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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 신진큐레이터 양성 및 지원프로그램 <이제 막 큐레이터>

교육기간
2020-10-03 ~ 2020-10-21
장소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
문의
032)760-1017

여성 평우회 활동 기록의 지속 가능성에 관하여

도듀이


지역성은 해당 지역의 특별한 성격을 말하며, 그 ‘특별함’은 해당 지역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고유성으로 지리, 기후, 지형 등의 자연 환경과 인구, 산업 등의 인문 환경 두 가지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지역의 특별함을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은 많고, 범위 또한 광범위해 주제 선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건(필자의 관심 주제 ‘여성’과 연관성과 도시 혹은 마을과의 연관성)을 통해, 여성 평우회(1983-1987)로 정할 수 있었다. 횟수로는 4년, 실질적으로는 3년 정도 비교적 짧은 활동을 했지만 이전의 여성 단체의 운동 접근 방식과는 다르게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구조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여성 대중의 힘을 모아 조직적으로 여성 해방을 이루고자 한 최초의 여성단체였다. 그들의 활동은 크게 조사연구 활동, 교육훈련, 홍보출판, 문화사업, 지역사회개발, 봉사사업, 타 여성단체 및 국제간의 친선 교류사업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의 활동과 방식은 오늘날 현존하는 여성운동 단체의 전형이 되었다.

필자는 여성 평우회 활동 중 하나인 ‘지역사회개발 및 봉사사업’을 중점으로 지역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성 평우회가 활동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점(초기 여성 문제에서 이후 마을과 거주민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의 해결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과 지역민과 함께 하는 마을 만들기를 해왔다는 사실에서 여성과 지역에 있어 중요성과 의의가 존재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들의 산실에 해당하는 공부방 현재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여, 그들의 활동 기록과 보존 방법들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그녀들의 활동의 산물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방법들까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교육, 아래로부터 개혁을 통한 민중의 지지 얻기

여성 평우회의 ‘지역사회개발 및 봉사사업’은 주로 여성의 교육활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교육활동은 여성 평우회 활동 중 독특한 점으로, 그들이 왜 이러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그 당시 배경과 상황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여공들의 주도로 전개된 노동운동(동일방직)이 있었지만, 여성운동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성의 지위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법률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차별을 겪고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결과로 이어진 데에는 운동 주체가 주로 여공들이었다는 것과 그들의 운동의 목적이 처우 개선에 제한되었다는 점 그리고 여성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 논의되지 못했던 점으로 추측하였다. 운동을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근본적으로 타개할 분위기나 동기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반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여성 평우회는 『여성평우 창간호(1984년 6월 18일)』를 발간해 「우리의 지침」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남녀를 차별하는 성차별 문화개혁을 위해 일한다’, ‘우리는 남녀공동의 노력으로 남녀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건설을 위해 일한다’ 라는 지침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성들은 ‘성차별’ 타파를 통해 ‘인간다운 삶’ 획득하고자 하는 바람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랜 기간 동안 남녀관계는 지배-복종의 관계로 해석되고 유지 되어왔다. 그로 인해 남성은 기득권층으로 부상한 반면, 여성은 묵묵히 그들을 위한 지지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잘못된 성의식들이 생성되면서 여성에게 수많은 불평등한 조건들이 붙기 시작했다.

‘남녀가 평등한 사회(여성들이 생각하는 인간다운 삶에 해당)’와 ‘사회참여 기회 획득을 하려면, 여성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 사회의 분위기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온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것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사회, 문화가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씌워진 틀(프레임)이 불평등한 것임을 여성들 스스로가 깨닫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가족부양과 생계유지를 위해, 이에 대해 자각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남성에 비해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에 사회에 여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제기할 능력과 여건이 밑받침 되지 못했다. 따라서 여성 평우회는 교육을 통해 여성 의견들을 피력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나아가 남성과 평등한 존재로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켜 보다 주체적인 여성들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만 봐도 여성 평우회가 교육 활동에 열을 올린 건 ‘독특함’이 아닌 ‘당연함’이었다. 그리고 교육활동 대상은 주로 빈민 여성으로, 소외계층이자 민중에 해당하는 기층 여성(빈민여성 포함)을 대상으로 한 것은 여성을 자선사업의 대상으로 보고 계몽을 하고자 한 기존 여성 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 교육의 사례로 ‘여성학 교실’을 들 수 있다. 이는 이전 여성교육운동과는 다른 점으로 여성의 평생 고용,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 제3세계 여성노동의 구조, 한국현대사와 여성운동 등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자리 제공의 역할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성학 교실은 여성으로서 받은 고통과 부당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되어줌으로써, 많은 여성들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여성해방운동을 위한 교재와 자료들을 열성적으로 발간했다. 그 중 정기적으로 발간한 「여성관계문헌목록집」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이처럼 여성 평우회는 다른 이들과 의견을 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교재와 자료들을 발간함으로써 교육의 범위를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 배양’으로 확장시켜 여성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켰다.


달동네 공부방은 지역과 공동체 활동의 중심지로

인천의 빈민운동(교육포함)활동의 대부분은 민중교회 중심과 노동운동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빈민운동은 1983년 중구 만석동의 큰물공부방(여성 평우회가 설립)에서 시작되어 이후 여러 빈민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왜 달동네에서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인가. 단순히 빈민운동이기 때문에 활동의 거점지를 달동네 선택했다고 보는 것은 그들의 활동 의의에 대한 가치를 저해하거나 곡해할 여지가 존재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서민 여성을 자선 사업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 역시 이러한 맥락 안에 놓여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 당시의 달동네 자체에서 비롯된 특징과 주민의 생활 패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 당시 만석동은 어업과 공업이 병존해 있는 지역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월남하거나,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 어민, 막노동 일꾼들이 섞여있었다. 이곳은 바닷가 부두 근처의 모래땅에 얼기설기 집을 짓고 들어선 판자촌으로 인해 인천에서 무허가 판잣집의 밀집도와 인구조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남성들은 철 따라 고기잡이나 굴 따기 등을 하거나 인근의 제철, 목재, 가구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기술이 없었기에 수시로 일을 바꿨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결혼의 유무에 따라 일 차이를 보인다. 주로 공장이나 서비스직에서 근무했던 미혼 여성들과 달리, 기혼 여성들은 막노동, 생선 행상 그리고 남성과 미혼 여성들이 기피하는 일들을 했다. 기혼 여성들은 집안일과 자녀문제로 부담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노동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로 인해 자녀 양육과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아이들은 방치되었다.

여성 평우회는 빈민여성들의 열악한 환경과 처우에서 사회적 모순을 발견했다. 바로 그 모순을 타파하고자 달동네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만석동과 북성동 지역 주민들의 실태조사를 실시했으며, 8개월간의 조사를 통해 지역민들의 생활 실태와 생계 욕구를 파악했다. 그들은 아동과 관련된 별도 조사와 문답을 통해 가정사를 파악하고, 이후 공부방 활동 자료로 사용했다. 이는 여성 평우회 교육 활동의 직접적인 목적이 빈민 지역의 문화결핍, 학습부진 현상을 개선하는 데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성 평우회낮에는 공부방에서 아이들(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을 돌보았고, 밤에는 아이의 엄마들을 만나러 다니거나 그들에게 정서 및 공동체 의식 함양 등 특별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 이외에도 추석에 주민잔치를 열어 여성들(기혼자가 대부분)이 공부방에 모여 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는 공부방이 아이들과 여성들을 교육하는 역할에서 확장되어 마을의 공동체 의식 형성을 하게함으로써 지역 운동 중심의 역할로 기여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도시개선사업으로 인해 철거가 결정되면서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부평 십정동으로 활동지를 옮기면서 만석동 지역 활동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보다 제대로 된 주민운동을 해나갈 것을 결심했다. 이는 주민 중심으로 한 활동을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만석동과 동일하게, 그들은 십정동에서도 지역조사(십정동 지역조직 활동을 위한 지역조사)를 진행했으며, 2개월간의 조사를 통해 공통관심사로 나타난 문제는 주거환경개선사업에 관한 것과 아이들의 탁아와 교육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님공부방(해님 놀이방과 해님공부방을 합쳐서 부른 것)을 만들어, 그곳에서 주부들과 함께 쓰레기 수거, 가로등과 공중전화 설치, 상하수도 정비 등 지역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여성 평우회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역민들과 유대하며 연대를 쌓아나갈 수 있었다. 주부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만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스스로 의견을 내고 결정하며 실행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모회를 만들어 해님방 운영과 동네 안팎의 여러 문제(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해님공부방에서 진행된 복강경 수술의 후유증 문제를 다룬 간담회 개최로, 이는 각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를 논의하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 사회 및 생활에서의 불편함을 논하며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지역의 여성 모임 성장으로 이어졌다.

이후 해님방은 공부방에서 지역운동 조직으로의 전환을 맞게 되었으며, 자모회 또한 해님여성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회원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활동으로 공동 부업을 시작하고, 자모회 자체의 역량강화 교육에서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으로 확대시켰다. 이외에도 지역신문 해님발간(1992년 열우물 소식지로 통합), 단오잔치(현재 십정동 열우물 축제로 이어짐), 동네 도서대여실 쉼터 운영과 열우물 진료소 그리고 여러 단체들과의 연대 활동도 담당했다. 해님방을 통해 여성 평우회는 만석동에서 개진한 활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스스로 일어나게끔 도와 자신들의 권리를 찾게 해주고, 보다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활동가들은 부단히 노력했다. 여성 평우회는 초기 공부방 선생님으로서 지역공동체 활동의 본격적인 박차를 가했다면, 그 활동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지역 활동가 역할로 그들의 포지션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힘을 키워 지역 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당시 해님방 대표였던 홍미영을 1991년 지방자치 선거에 내보내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시킨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빈곤한 삶을 살아온 여성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세워준 사건이었다.


‘구술’에서 지속가능성을 발견하다.

여성 평우회는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지역 모두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요성과 의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 산실에 해당하는 공부방은 만석동의 경우 철거되어 현재 만석어린이공원으로 변했고, 십정동 해님공부방 또한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어 현재 개발을 진행 중이다. 철거로 인해 여성 평우회는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줄 기회마저도 빼앗긴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성 평우회의 가치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필자는 여성 평우회의 지속적인 기록 가능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구술기록조사(구술사)’에서 고려해보았다. 그 이유로 첫째, 구술기록의 특징에 있다. 구술기록은 지역이 가진 특수성이나 특정 집단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성’이라는 특정 집단이자 인천이라는 지역 그리고 교육 활동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여성 평우회 활동은 이에 적절하다. 그리고 여성 평우회 주요 회원들뿐만 아니라 십정동과 만석동에 살았었던 주민들까지도 인터뷰 대상에 포함할 수 있기에, 역사에서 주로 배제되었던 소외 계층의 시각이 최대한 반영된 역사 서술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대상들의 육성을 기록하여 정보가 왜곡될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육성기록은 문헌기록에 비해 서술자의 주관이 개입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평우회에 관한 기록과 자료가 다소 부족한 현 시점에서 구술기록은 문헌에서 서술되지 않은 부분들을 보충할 수 있다.

그러나 구술을 채록하고 기록하는 것만으로 여성 평우회 활동의 역사적 가치는 지속될 수 없다. 그 역사적 가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서로 공유를 하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정보가 넘쳐나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정보에 대한 욕구는 시시때때로 변화하기에 그에 맞는 유형의 구술기록물 제작 또한 중요하다. 유념해야할 점은 대중성은 물론, 폭넓은 연령의 사람들이 자료에 쉽게 접근하고 읽을 수 방법들까지도 생각해야 함에 있다.


1)여성평우회는 창립(1983년 6월)과 해산 (87년 8월)기간으로 따지면 4년 남짓이지만, 그들은 그 사이 논투(이론투쟁)이라고 불린, 단체의 활동을 둘러싼 이론투쟁으로 인해 1년을 보냈다. 그래서 논투 기간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활동 기간은 3년 정도로 파악할 수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발췌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308)

2)운동 주체들의 제한, 생존권 차원과 여성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요구 등 활동범위의 제한 그리고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 등을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3)위의 사이트

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이트에서 발췌(https://www.kdemo.or.kr/blog/dictation/post/617)

5)“여성 평우회는 공부방을 만들어 빈민여성운동을 전개했다. 만석동의 ‘큰물 공부방’과 십정동의 ‘해님 공부방’이 대표적이다. 1983년에 개원한 만석동 큰물 공부방에서 빈민여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거불량도시 미관저해 및 화재위험 지역으로 위험시되며 결국 1985년 가을에 철거가 추진되었다. 1986년, 만석동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부평 십정동으로 오면서 해님공부방(해님방)을 개원했으며, 교육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공부방을 통한 기층여성 교육활동은 이전의 운동과는 독특한 점이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여성 평우회가 여성과 지역에 기여한 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6)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발췌(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308)

7)달동네의 시초는 일제 강점기 ‘토막민촌’으로, 일제의 수탈을 피해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주인 없는 산비탈이나 개천가에 허가 받지 않고 지은 것이다. 달동네도 그 중 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 8.15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인구가 급격하게 집중되고 주택이 부족하게 되자 빈민계층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발생된 것이다. 달동네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이주민들에 의해 급하게 만들어진 동네이자 경제적 조건이 낳은 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8)인천 지역 빈민운동은 민중교회를 주도로 진행되었다. 1986년 5월 김정택 목사는 인천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다 송현동에 산마루 교회를 열어 공부방, 의료 활동, 노동 상담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박종렬 목사도 85년 인천 동구 송림동에 사랑방 교회를 열고 탁아소 공부방을 만들어 지역 노동자들의 활동 공간이 되었다. 88년에는 조인영 목사가 송현동에 샘교회를, 89년 6월에는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박종기 신부가 김명자, 김미경 활동가와 함께 송림동에 나눔의 집을 열어 빈민운동을 시작했다. - 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 지음,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을 찾아서』, 한울, 2017, p.429

9)소책자 『인천여성/노동 기행』, 총연맹 여성위원회 및 인천본부 여성위원회, 2019, p.24

10)불안정 고용, 위험한 현장, 낮은 임금, 열악한 주거 환경(상하수도, 도로, 주택 등), 질과 양에서 부족한 문화시설, 이들은 우리 사회(인천)에서 최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지 수행할 능력(일, 교육 등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있기에 건강하다. 그러나 그들은 교육 정도가 낮고 생계 꾸리기에도 급급해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알지 못하고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 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 지음,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을 찾아서』, 한울, 2017, p.434

11)평우회 회원이었던 홍미영은 대학시절 봉사활동(중랑촌 뚝방촌)에서 세상의 불평등을 마주하며 빈곤의 사회 문제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1983년 인천 만석동으로 이주하여 큰물 공부방을 중심으로 빈민 여성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했다.

12)위의 책, p.432

13)만석동 큰물 공부방의 지역 활동에는 ‘연대의 부족’의 한계점이 있었다. 그 당시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빈민지역 활동가들과의 소통의 부족은 이후 큰물공부방 철거 투쟁에 있어 함께 싸울 이들을 인천 지역이 아닌 서울지역의 활동가들로 구성해 도움을 받게 만들었다. 해당 지역에 직접 거주한 이는 일부였으며, 대부분은 인천을 출퇴근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지역 문제(철거)에 맞서 근본적, 현실적인 대안들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한계가 있었다(주민지도력의 필요성). 이는 이후 부평구 십정동 빈민지역운동을 해 나가는 기준과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당시 가족계획운동의 하나로 널리 시행된 것으로, 병원이나 보건소는 복강경수술 환자가 많을수록 국가에서 보조받는 시술비가 많아져서 홍보요원을 통해 강제로 환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는 주로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시술하였으며, 후유증과 합병증에 대한 사전 교육 없이 반강제로 수술을 강요했다. - 이경숙, 「주부운동」, 한국여성민우회10년사, 1997, p.7

15)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 지음,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을 찾아서』, 한울, 2017 일부 내용 참고


도듀이 | 동양화 전통 재료와 기법들을 설치, 입체 등과 결합시켜 자신만의 언어를 탐구하고 만들어나가고 있다. 초기 작업이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탐구였다면, 현재 ‘모성’이 내포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